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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청사

작성자 : 정경숙 작성일 : 2010-07-06 조회수 : 421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청사

이번 호에는 9ㆍ15 당시 인천시 총무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전시 혼란 속의 시청을 수습했던 김동순 전 문화원연합회 인천시지회장의 실화와 인천중학교 재학생으로서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문학평론가 김양수 선생의 생생한 체험담을 싣는다. 이분들의 증언을 우리가 다시 듣고 새겨야 하는 이유는 어떤 경우라도 더는 서로가 죽이고, 죽는 상잔을 벌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망각한 민족은 망한다’고 했듯이 우리는 화해와 용서를 할 수 있지만, 전쟁의 참혹상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편집자 주>
정리 조우성 시인ㆍ인천시 시사편찬위원

 

 

전장의 혼란 속에 떠 돈 인천시
김동순 (당시 인천시 인사계장)
표양문 시장이 국회의원 출마로 사퇴하고 서울시에 재직하고 있던 지중세 씨가 6월 초 후임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때 6ㆍ25전쟁이 터졌다. 그 다음날부터 옹진, 연백 지역에서 피난한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인사관리를 담당하던 나는 직원 1백여 명을 당ㆍ숙직 겸 피난민구호대책 요원으로 배치했다.
시청(현 중구청) 뒤 공터에 가마솥을 걸고 대한부인회의 협조를 받아 주먹밥을 만들어 시내 각 학교에 임시로 마련한 수용소에 4~5일간 공급했다. 이때 인천상공회의소 하상훈 선생이 시청으로 찾아오셨다. 시장과 면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며 선생은 시장이 시민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달아났다며 노발대발하셨다.
시장도 없이 공무원들이 시청을 지키고 있던 셈이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봤으나 시정이 공백상태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맥이 풀려 직원들에게 빨리 귀가하도록 했다. 부랴부랴 집에 도착해 피난 준비를 하는데 가두방송 소리가 났다.
“시청이 회복되었으니 시 직원은 속히 등청하라”는 것이었다. 수원으로 후퇴했던 동인천경찰서 병력들이 돌아와 시장실을 포위하고 ‘해방군환영준비위원회’의 회의장을 공격하여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걸어 시청에 도착하였다. 시청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정문 입구에는 10여 구의 시신과 부상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좌익계 신문기자 몇 명이 서성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때 갑자기 시청 마당을 가로질러 뛰면서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호적과장이었다. 나는 시청 직원 몇 사람과 함께 정신이상자가 돼 버린 호적과장을 경찰국에 데리고 가 보호를 요청하였다.
경찰국에서 바삐 집(용동)으로 돌아와 피난 짐을 지고 골목길을 따라 율목동, 유동으로 빠져나가는 도중에 한때 시에서 근무했던 낯익은 사람과 마주쳐 크게 당황했다. 그는 대뜸 어디 가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피난 간다고 하자, 어딜 가도 마찬가지라며 자기는 지금 인민위원회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전쟁 전, 인천시 직원 중에는 죄익계 소속원으로 당국에 검거되어 사퇴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 사람도 그런 케이스였다. 나는 잔등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내며 옥련동, 동막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밤중에 겨우 산에서 내려와 목선을 얻어 타고 3일 후 충남 송산면에 도착하였다.
그 곳 팔봉산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식량이 떨어져 지곡 해변으로 나왔는데 거기서 인천부 발행 ‘선박증’을 단 큰 운반선을 발견했다. 선주에게 청해 도정 안 한 겉보리 한 말을 받아 쥐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정체불명의 괴한 셋에게 잡혀 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당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창고에서 지내는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탈출을 감행했다. 서둘러 구금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해 놓았던 배를 빌려 타고 야밤에 풍도를 거쳐 강화로 갔으나 그곳도 위협이 느껴져 며칠을 버티다가 다시 돛단배를 타고 팔미도 뒤쪽으로 가 해상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경위로 나는 9ㆍ15인천상륙작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연합군 함대는 월미도와 인천 시가지를 향해 거대한 함포를 조준해 불을 뿜어대기 시작하였다. 하늘과 땅을 흔드는 상륙작전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장관을 이루었지만 우리 고장을 향해 무수한 포탄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자니 심정이 여간 착잡한 게 아니었다.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상륙작전이 끝난 후인 9월 25일, 일반인의 선박 입항이 허가되었다. 나는 먼저 시청을 찾아갔다. 건물은 이상이 없었으나 시장실은 크게 파괴되어 있었다. 10월 말이 돼서야 겨우 정리정돈을 할 수 있었다. 상부의 지시로 전 부천군수 강해승 씨가 시장 직무를 수행하였고, 뒤늦게 복귀한 지중세 씨는 피난 시의 행동으로 사임당하고 말았다.<전 인천시 부시장ㆍ2003년 작고>

 

석바위 언덕에서 바라본 상륙작전
김양수 (당시 인천중학교 학생)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할머니께서 ‘인민군 탱크’가 밤새 들어왔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놀란 나머지 문밖에 나가보니 과연 누런 쇳덩이 같은 탱크가 기다란 포신을 이리저리 돌리며 용동 마루턱(현 중구 용동 소재)에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경찰관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며 국군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으로 있는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엔 맥고모자, 왼쪽 팔에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칼빈 소총 하나씩을 어깨에 둘러맨 키다리 이 씨와 땅딸보 나 씨가 환호성을 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들은 싱글벙글 웃음 띤 얼굴로 우선 아침밥이나 먹으면서 자초지종을 들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곧 늙은 가정부가 차려주는 조반을 들면서 그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실토하는 것이었다.
사실 자기들은 1년 전 북조선에서 훈련을 받고 남쪽으로 파견되어 온 공작대원이며 북에서 남침해 올 때까지 이곳 사정을 면밀하게 알아두었다가 인민군이 쳐들어오는 즉시 마중을 나가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이 안 들 수 없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온 뒤 두서너 집에 고용살이를 해 봤지만, 학생(나)처럼 인정이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땅딸보 나 씨는 이제 자기들 세상이 되었다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갖가지 크고 작은 과업에 참가했으나 노동절날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동양방직 근로자들을 비롯한 여러 공장 노동자들을 큰 시위로 이끈 때처럼 신나는 때가 없었다고 떠벌였다. 그때부터 그 두 사람은 이제 우리집 고용인이 아니라 해방군 전사로서 밖에 나가 활동하며 이따금 우리집에 들르곤 하였다.
그 후 나는 의용군 색출을 피해 숨어다니다가 가족들과 소래에 있는 먼 친척의 농가로 피난을 갔다. 하루는 의용군 색출대에 추적당해 옥수수 밭에 숨어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다. 9월로 접어들면서, 우리 가족은 소달구지에 싣고 나온 재봉틀이며 옷가지, 이불 등을 모두 보리쌀과 바꾸어 먹어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아버님은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고 깨끗이 죽자고 제의하시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나는 인천에 있는 우리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며칠이 안 돼 이웃집 아저씨가 찾아와 할아버지께 저들이 모두 보따리를 싸고 소리 소문 없이 도망쳤다고 전했다. 당 사무실이 텅텅 비었고 자신은 내일(15일) 정오에 함포 사격 개시와 함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는 단파방송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신 할아버님께서는 인천이 불바다가 될 터이니 너는 며칠 동안 소래에 있는 가족 곁에 있다가 상륙작전이 끝나면 돌아오라고 간곡히 타이르셨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병자 차림을 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으로만 해서 석바위 언덕까지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피난민이 쉬고 있었다. 모두들 바다 쪽을 가득 메운 연합군 함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미군 그라만 전투기 편대가 새까맣게 하늘을 메우고 인민군 포대가 있는 월미산과 도원산 정상에 기관포를 퍼붓고 있었다. 나는 그때 피난민들 틈에 끼어 앉아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침과 분침이 12시에 합쳐지자 함포음과 함께 ‘히타치’ 공장터가 있던 해변에 큰 포탄이 떨어지고 모래먼지와 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시내 쪽으로는 작은 포탄들이 우박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발사되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여 소래 농가로 찾아갔다. 밤중이 되자 아버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인천 시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시커먼 연기와 화염들로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나는 왜 할아버님, 할머님을 모시고 나오지 않았는가 후회막심이었다. 아, 저 불바다 속에 모두 무사하실까 하는 가슴 에이는 심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틀 뒤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모두 인천 시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두 분이 모두 무사하셨다. 시내에 들어서니 멀리서 봤을 때와는 달리 민가가 전부 불에 탄 것은 아니었다. 포탄은 인민군이 있는 군사 시설에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그 주변의 민가가 파손되고, 화재가 일어났을 뿐이었다.<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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