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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자료 불태우고 소월미도 등대 폭파

작성자 : 정경숙 작성일 : 2015-08-04 조회수 : 435


행정자료 불태우고 소월미도 등대 폭파

'조선의 소일본(小日本) 진센(Jinsen)’ 일본인들은 인천이란 도시를 자신들이 건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대를 이어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했던 집과 토지를 남겨두고, 게다가 선조의 무덤까지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천의 일본인들의 안타까운 심경이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라는 책에 담겨 있다.
글 이희환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원

잘 있거라 인천아 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
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울리겠지 월미도야
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
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 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


인천인양지

위 노랫말은 1951년에 결성된 ‘후쿠오카 인천회’에서 출간한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란 책에 수록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서태평양 멜라네시아의 항구도시 라바울을 떠나면서 불렀던 일본군가에 인천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심사를 가사로 담아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60년 이상 인천에 살았던 일본인들 약 100명이 1946년 3월 2일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월미도를 굽어보며 마지막 집단 철수를 할 때 눈물을 흘리며 열창했다고 한다. “조선의 소일본(小日本) 진센(Jinsen)”(일본인들은 인천이란 도시를 자신들이 건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에서 대를 이어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했던 집과 토지를 남겨두고, 게다가 선조의 무덤까지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천의 일본인들의 안타까운 심경이 담겨 있다.
이 노랫말이 수록된 <인천인양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을 통해 패전이 확인된 직후, 일본제국주의 국민으로 인천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던 인천의 일본인들이 황급히 가산을 정리해, 그들의 모국 일본으로 철수, 귀환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인양(引揚)’이란 한자어 뜻 그대로 하자면, ‘물체나 시체 따위를 위로 끌어서 옮긴다’는 의미인데,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이 본토 귀환과 철수과정을 ‘인양’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인천 이민 2세로 인천 개항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를 편집했던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쓴 <인천인양지>의 서두에 나와 있지만, 이 책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인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가 일본인들의 <조선철수사> 연구를 기획해 고타니에게 인천에서 철수한 과정에 대해 집필을 권유해 출간하게 되었다. 모리타는 <인천인양사>를 포함해 모두 네 권의 <조선종전의 기록>이라는 책자를 남겼는데, <인천인양사>는 자료편 제2권 ‘남조선지역의 철수’에 경성, 부산, 목포 등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던 주요도시와 함께 인천에서 철수한 과정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겨 있다. 
“소화 20년 8월 15일의 중대한 방송으로 일본인들은 느닷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바뀐 것으로 오로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하였다.”(이하 인용은 윤해연 역, <조선철수지> 상·하, <황해문화> 2001년 봄·여름호)라고 시작하는 <인천인양지>의 전편을 읽다 보면, 패전 당시 2만 명을 넘겼던 인천의 일본인들이 뜻밖의 패전을 맞아 어떤 정치적 상황에 내몰렸고, 어떤 과정을 거쳐 공포에서 벗어나 치밀하게 철수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광복을 맞은 인천의 한국인들이 횃불을 켜들고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환호했던 것을 고타니는 ‘광희난무(狂喜亂舞)’했다고 표현했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인천의 한국인들이 그동안 억눌렸던 심정으로 자신들을 습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문을 걸고 잠그고 전전긍긍했던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돈을 우체국에 예금하든지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소월미도 등대(인천인양지)


또 인천부를 장악했던 일본관리들은 이케다(池田淸成) 인천부윤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미군의 상륙 이전에 대비한 퇴각 준비로 관청 서류를 대대적으로 소각했는데, 그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고 한다. 8월 17일 오후 4시에는 이케다 부윤 등이 참여한 가운데 1890년 건립된 이후 인천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인천신사(仁川神社)의 신체(神體)를 신전에서 꺼내 한국인들 몰래 배를 이용해 ‘○○지점’에 숨겼다.
패전한 일본인들이 전국적으로 상조회 및 알선기관 성격의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인천에서 세화회 결성을 위해 첫 모임이 이루어진 것은 8월 21일이었다. 고타니의 제안으로 인천시사 사무소에 밤 10시에 모였던 이들은 이후 두 차례의 준비위원회 모임을 거쳐 8월 26일 인천세화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인천세화회는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창자로서 필자의 구상은 미래의 거류민회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잔류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인회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즉 단순한 철수만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남아서 머무르게 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고 고타니가 기록했듯이, 인천세화회는 “우리에게는 전진과 재건설만 있을 뿐 후퇴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자신들의 심경을 토로했다.
고타니 마스지로는 <인천인양지>에 기록하지 않고 은폐했지만, 인천 일본인들이 저지른 악행 중에는 역시 곧 있을 미군의 상륙을 방해할 목적으로 1903년 한국 최초로 건설된 소월미도 등대를 8월 27일 폭파한 사건이다. 미군 선발대가 8월 25일 이미 인천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월미도 등대를 어떤 연유로 폭파했는지, 밝혀야 할 과제다. 9월 8일로 예정된 미군의 인천상륙은 인천 일본인들에겐 또 다른 공포였다. 일본인들은 특히 부녀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매우 우려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군은 인천의 치안을 일본경찰에 맡겼다. 당일 외출이 금지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부두로 나왔던 인천의 자치단체인 보안대의 지도자 권평근과 이석우가 일본경찰대가 쏜 총에 희생된 것도 이때다.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성명 발표 이후 불안에 떨었던 인천의 일본인들은 8월 23일 미군의 항해금지령과 10월 15일 이케다 부윤의 파면과 한국인 임홍재(任鴻宰) 시장의 부임 이후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본인 세화회의 치밀한 준비와 미군의 안정적인 철수, 귀환 배려조치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끝까지 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인천의 일본인 2만여 명과 북한 땅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일본인 기만명을 선편과 기차편으로 모두 일본으로 구출한 후, 인천일본인세화회 100명이 마지막으로 1946년 3월 2일 인천역을 떠나 인천을 탈출하면서 인양의 대장정을 마쳤다.
1883년 이래 한국인에게 끼쳤던 온갖 악행과 피해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끝내 없이, 월미도의 벚꽃을 그리며 <잘 있거라 인천아>를 부르며 떠났다.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인천 개항장 일대를 찾아와 70년 전 인천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위 노랫말은 1951년에 결성된 ‘후쿠오카 인천회’에서 출간한 <인천인양지(仁川引揚誌)>란 책에 수록된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점령했던 서태평양 멜라네시아의 항구도시 라바울을 떠나면서 불렀던 일본군가에 인천을 떠나는 일본인들의 심사를 가사로 담아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60년 이상 인천에 살았던 일본인들 약 100명이 1946년 3월 2일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월미도를 굽어보며 마지막 집단 철수를 할 때 눈물을 흘리며 열창했다고 한다. “조선의 소일본(小日本) 진센(Jinsen)”(일본인들은 인천이란 도시를 자신들이 건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에서 대를 이어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마련했던 집과 토지를 남겨두고, 게다가 선조의 무덤까지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천의 일본인들의 안타까운 심경이 담겨 있다.
이 노랫말이 수록된 <인천인양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을 통해 패전이 확인된 직후, 일본제국주의 국민으로 인천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던 인천의 일본인들이 황급히 가산을 정리해, 그들의 모국 일본으로 철수, 귀환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인양(引揚)’이란 한자어 뜻 그대로 하자면, ‘물체나 시체 따위를 위로 끌어서 옮긴다’는 의미인데,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이 본토 귀환과 철수과정을 ‘인양’이란 용어로 표현했다.
인천 이민 2세로 인천 개항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출간된 <인천부사(仁川府史)>를 편집했던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쓴 <인천인양지>의 서두에 나와 있지만, 이 책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인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가 일본인들의 <조선철수사> 연구를 기획해 고타니에게 인천에서 철수한 과정에 대해 집필을 권유해 출간하게 되었다. 모리타는 <인천인양사>를 포함해 모두 네 권의 <조선종전의 기록>이라는 책자를 남겼는데, <인천인양사>는 자료편 제2권 ‘남조선지역의 철수’에 경성, 부산, 목포 등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던 주요도시와 함께 인천에서 철수한 과정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겨 있다. 
“소화 20년 8월 15일의 중대한 방송으로 일본인들은 느닷없이 죽음의 골짜기로 추락하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 눈앞의 문제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뒤바뀐 것으로 오로지 조선인들의 습격이나 박해 및 생명 재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만 존재하였다.”(이하 인용은 윤해연 역, <조선철수지> 상·하, <황해문화> 2001년 봄·여름호)라고 시작하는 <인천인양지>의 전편을 읽다 보면, 패전 당시 2만 명을 넘겼던 인천의 일본인들이 뜻밖의 패전을 맞아 어떤 정치적 상황에 내몰렸고, 어떤 과정을 거쳐 공포에서 벗어나 치밀하게 철수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광복을 맞은 인천의 한국인들이 횃불을 켜들고 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환호했던 것을 고타니는 ‘광희난무(狂喜亂舞)’했다고 표현했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인천의 한국인들이 그동안 억눌렸던 심정으로 자신들을 습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습격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문을 걸고 잠그고 전전긍긍했던 일본인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돈을 우체국에 예금하든지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또 인천부를 장악했던 일본관리들은 이케다(池田淸成) 인천부윤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미군의 상륙 이전에 대비한 퇴각 준비로 관청 서류를 대대적으로 소각했는데, 그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고 한다. 8월 17일 오후 4시에는 이케다 부윤 등이 참여한 가운데 1890년 건립된 이후 인천 일본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인천신사(仁川神社)의 신체(神體)를 신전에서 꺼내 한국인들 몰래 배를 이용해 ‘○○지점’에 숨겼다.
패전한 일본인들이 전국적으로 상조회 및 알선기관 성격의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하기로 하고, 인천에서 세화회 결성을 위해 첫 모임이 이루어진 것은 8월 21일이었다. 고타니의 제안으로 인천시사 사무소에 밤 10시에 모였던 이들은 이후 두 차례의 준비위원회 모임을 거쳐 8월 26일 인천세화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인천세화회는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창자로서 필자의 구상은 미래의 거류민회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잔류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인회를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즉 단순한 철수만을 목표로 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남아서 머무르게 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고 고타니가 기록했듯이, 인천세화회는 “우리에게는 전진과 재건설만 있을 뿐 후퇴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자신들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본인 고별 인사(대중일보 1946.3.3 2면 광고)


고타니 마스지로는 <인천인양지>에 기록하지 않고 은폐했지만, 인천 일본인들이 저지른 악행 중에는 역시 곧 있을 미군의 상륙을 방해할 목적으로 1903년 한국 최초로 건설된 소월미도 등대를 8월 27일 폭파한 사건이다. 미군 선발대가 8월 25일 이미 인천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월미도 등대를 어떤 연유로 폭파했는지, 밝혀야 할 과제다. 9월 8일로 예정된 미군의 인천상륙은 인천 일본인들에겐 또 다른 공포였다. 일본인들은 특히 부녀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매우 우려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군은 인천의 치안을 일본경찰에 맡겼다. 당일 외출이 금지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부두로 나왔던 인천의 자치단체인 보안대의 지도자 권평근과 이석우가 일본경찰대가 쏜 총에 희생된 것도 이때다.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성명 발표 이후 불안에 떨었던 인천의 일본인들은 8월 23일 미군의 항해금지령과 10월 15일 이케다 부윤의 파면과 한국인 임홍재(任鴻宰) 시장의 부임 이후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일본인 세화회의 치밀한 준비와 미군의 안정적인 철수, 귀환 배려조치에도 불구하고 인천에 끝까지 남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인천의 일본인 2만여 명과 북한 땅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일본인 기만명을 선편과 기차편으로 모두 일본으로 구출한 후, 인천일본인세화회 100명이 마지막으로 1946년 3월 2일 인천역을 떠나 인천을 탈출하면서 인양의 대장정을 마쳤다.
1883년 이래 한국인에게 끼쳤던 온갖 악행과 피해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끝내 없이, 월미도의 벚꽃을 그리며 <잘 있거라 인천아>를 부르며 떠났다.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인천 개항장 일대를 찾아와 70년 전 인천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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